나의 작업의 가장 내밀한 곳에는 언제나 재 한 조각이 자리하고 있다.

금기의 벼락 같은 순백은 존재 그 자체로 욕망이라는 환한 불씨를 일으킨다. 하지만 눈부시게 빛났던 빛 뒤에는 끝없는 암흑이 펼쳐지고, 강렬히 타오른 불길은 내뿜었던 열기만큼 싸늘한 화인을 남긴다. 불꽃이 사그라든 잿더미는 죄의식이라는 그림자가 되어, 지울 수 없는 주홍 글씨가 되어 나를 따라다녔다. 그리고 그 잿더미를 헤집어 가며 나는 오랫동안 해소할 수 없는 결핍을 앓았다. 금기를 어기고픈 욕망과 금기를 지키지 않았다는 죄의식은 끊임없이 상충하며 불꽃과 재를 일으켰고, 그 연기 속에서 나는 갈증에 끓었다. 바닷물을 마시며 목말라하듯 나는 화염을 들이쉬며 산소를 꿈꿨다. 나의 작업은 이런 모순의 해갈을 위해 내 피를 내어 마셔온 상흔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욕망과 죄의식은 결국 한가지이며, 옳고 그름도 하나로 꿰어져 있다는 것을 안다. 시간에는 시작과 끝이 있고, 화복은 돌고 도는 것이기에 한쪽이 어긋난 바에 이르면 다시 좋은 것이 있게 마련이다. 사시가 순환하여 서로 태어나게도 하고 서로 죽이기도 하며, 그 속에 욕망과 증오, 안위가 서로 바뀌며, 화복이 서로 번갈아 나타나며, 소멸과 생장, 충만과 공허가 번갈아 계속되고 그쳤다가 다시 시작되는 것이다.

내 작업 안에서의 붉은색, 불이라는 소재는 생성과 금기, 동시에 양극단의 것들이 태워지며 서로 하나가 되는 과정이다. 양극은 닮아있으며 서로 통한다. 어둠은 빛의 부재인데 빛은 그릴 수 없고 어둠은 그릴 수 있다. 우리가 공허, 부재를 인지하는 것은 존재를 통해서 가능하지만, 존재 역시 부재와 공허를 통해서 각인된다. 액체로서 있다가 종이에 흡수되고 남은 자국, 불타고 남은 재, 빛이 비췄기에 만들어진 그림자가 이를 보여준다. 자국, 흔적, 이것들은 부재이자 동시에 본질의 존재를 알리고 남은 또 하나의 존재이다.

불꽃은 결국 그를 피운 산소와 한 몸이며 그 정반합을 뚫고 나오는 재는 깊은 내면에 자리 잡아 새로운 불꽃이 된다. 결국 불꽃과 산소와 재는, 욕망과 금기와 죄의식은 하나의 티끌로 합일하여 희고도 검은 자취로 모이고, 나를 사르고 남은 허공은 음양의 화(化)로 응집한다. 순백으로 타오르다 암흑으로 남는 것은 진홍빛 매개항 으로, 부재를 통해 인지하는 존재이자 존재와 부재를 하나로 휘감는 원형 세계이다.

나의 작업의 가장 내밀한 곳에는 언제나 양극의 윤회가 자리하고 있다.